봇치 더 락 마이너 갤러리
[🍿후기]
(장문) 봇치 덕분에 삶이 바뀐 늙은이입니다.
안녕하세요.
진지한 얘기라서 존댓말 잠깐만 쓸게요.
새벽에 잠이 안 오는 바람에 떡밥 편승해서 낄낄대다가
문득 무거운 주제로 흘러가기에 새벽 감성이 차올라서 끼적입니다.
일종의 봇치 총집편 극장판 후기라서 후기탭 쓰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소위 말하는 틀딱입니다. 아마 여기엔 고등학생이라면 제 나이 반절인 친구도 많을 거예요.
아버지는 제 나이에 이미 절 유치원 보내고 열심히 먹여살리셨기에,
저 또한 그 나이가 되면 가장으로서 한 사람 몫을 하면서 건실히 살아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좀 부끄럽지만 급식 시절 성적도 좋았거든요. 중학생 때는 전교 11등까지 해보고,
고등학교 가서도 1~2학년은 특반 소속이었고 3학년 때는 해이해져서 일반 반으로 내려갔지만 그때도 반 1~2등은 줄곧 고수했습니다.
중학생 때만 해도 의대를 보내자느니 법대를 보내자느니
부모님이 온갖 설레발 치신 것에 비하면 미약하게 지거국 컷에 겨우 들었지만
그래도 학벌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엔 충분한 스펙이라고 자부하며 입교했습니다.
그런데 워낙 초중고등학교 시절 공부에 시달렸던 탓일까요.
신입생 왔다며 신이 나서 술을 돌리고, 환영회를 해주고, 어디 출신이냐, 뭘 잘하냐, 형이랑 같이 놀래? 이런 선배들의 환대에 순간 정신이 풀어지며
아, 가시밭길 같던 수험생의 삶이 끝이 나고 장및빛 로드가 펼쳐지는구나 하는 환상에 사로잡혔습니다.
대학, 사회가 훨씬 더 위험하고 치열한 경쟁의 장임을 깨닫기엔 너무 어렸습니다.
저는 놀고 또 놀았습니다. 무려 1학년의 두 학기를 모두 학사경고를 받았습니다.
저는 부모님께 머리를 찧으며 사과드리고 군에 입대했습니다. 그리고 전역하니 스마트폰이란 게 그새 유행하더군요. 사회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이젠 새 사람이 되어야지!하고 다짐한 것도 잠시... 학사경고를 한 번 더 받고 그만 성적 부진으로 제적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다행히도 원코인은 있었습니다. 제적을 당해도 한 번은 재입학 절차로 들어가는 것이 가능했거든요. 등록금을 한 번 더 내야했지만...
그럼에도 저는 정신을 못 차리고 두 번 학고를 더 받았고, 만약 학고를 한 번이라도 더 받으면 학교에서 영구 제적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동안 갖다바친 등록금이 허공으로 날아갈 위기였던 겁니다.
아마 저처럼 대한민국에서 학고를 5번이나 받은 미친놈은 별로 없을 거예요.
결국 어머니는 참다못해 제 원룸까지 올라와 함께 살기로 하셨고
학업을 제외한 모든 부분, 즉 청소 및 빨리, 식사 등등을 손수 챙겨주셔서 저는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졸업하고도 일이 순탄하게 풀리진 않았습니다. 학교를 늦게 졸업하는 바람에 저는 이미 나이를 많이 먹었거든요.
취직 시장에 뛰어든 나이가 29살이었습니다.
무경력 신입 치곤 다소 많은 나이긴 해도 아직 마지노선을 넘진 않았다고 생각해서 저는 최선을 다해 구직 활동을 개시했습니다.
그러나 곧 코로나 시즌이 찾아왔고, 구인 회사가 절반 미만으로 뚝 떨어졌습니다.
그나마 부동산 회사 한 곳에 취직했지만 고객들한테 입 발린 소리로 땅을 비싸게 팔아먹는 회사라는 점을 깨닫고
'아, 이건 아니구나' 싶어서 2주일만에 퇴사했습니다.
그렇게 구직 적기를 놓치고 더 늙어버린 저는 30대 초중반이 돼있었고, 이 나이의 무경력 신입을 원하는 회사는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저는 부모님께 한심하게 용돈을 타 생활하며 과거의 흔적들을 하나씩 살펴봤습니다.
소설 원고들.
사실 저는 라이트노벨 작가가 꿈이었거든요. 중학생 때부터. 그래서 문예창작학과로 진학했습니다.
하지만 시드노벨, 노블엔진처럼 국산 라이트노벨을 출판하던 레이블은 장사가 잘 안 됐는지 대부분 수입산 번역에만 집중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저는 자가출판이라는 미친 짓 외에는 아예 모든 루트가 끊겨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제 원고들은 화장실 휴지만도 못한 천쪼가리, 모바일게임 가챠 아이템만도 못한 데이터쪼가리로 전락한 겁니다.
이때 술을 안 마시고 어떻게 버텼는지 모르겠습니다.
도저히 버티지 못한 저는 극단적인 선택도 고려해보다가, 편의점 알바로 모은 돈을 싸들고 무작정 독립하겠다고 했습니다.
"나이 34살에 어머니 아버지께 용돈 받으면서 생활하기는 싫다. 값싼 원룸 하나 구해서 혼자 죽든 살든 하겠다."
부모님은 그 와중에 저 같은 버러지한테 잔정이라도 남으셨는지 '힘들면 언제든지 내려와~'하고 따뜻한 말씀을 남겨주셨습니다.
가엾은 우리 부모님.
구미에서 파주.
거의 한반도를 횡단하며 올라온 제게 다가온 건 차가운 현실이었습니다.
아무 스펙도 쌓지 않고 부모님 곁, 고향집을 떠난다고 뭐가 바뀔 일이 있을까요.
45만원 월세 때문에 추가 지출만 발생할 뿐이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저는 정신을 못 차리고, 아니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지하철 끊고 서울의 용산CGV를 왕복하면서 영화로 머릿속을 치유하고 있었습니다.
근처 편의점 알바로 겨우 버는 돈으로는 이 생활이 감당 안 돼서 그 와중에도 월 20만원씩 꾸준히 용돈을 타서 쓰고 있었습니다.
한심한 새끼, 미친 새끼라는 걸 알면서 자해까지 하려고 했습니다. 상황이 도저히 나아질 기미가 안 보였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습관적으로 찾아온 용산CGV에 웬 생소한 애니메이션이 걸린 것을 발견했습니다.
어린 씹덕 친구들 지갑 털어가는 애니겠네...하고 코웃음치면서 넘기려고 했는데
웬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다니기도 하고, '가장 좋아하는 멤버는??' 영문 모를 인터뷰를 하는 어떤 사회자 분도 계시고.
(이때가 성우 방한 당일인 것을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습니다.)
꽤 인기가 많은 애니라는 걸 깨닫고 호기심이 생겨 개봉일 굿즈라도 받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운명의 8월 7일, 저는 입관했습니다.
관객들 상당수가 젊은 친구들이더라고요. 급식 친구들도 상당하고, 많아봐야 학식 친구들.
한때 나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하고 잔주름 섞인 쓴 미소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영화를 봤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은 어린 미소녀라는 점을 제외하면 저와 상당히 닮았습니다.
구독자 3만을 달성한 기타 히어로까진 아니지만, 저도 한때 노블엔진 1챕터의 승부라는 형식의 라노벨 공모전에서 최종심사까지 올라가본 적 있거든요.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아마 4번째로 열리는 공모전이었고, <도전! 에스퍼 리그>였나 그런 제목일 겁니다 ㅎㅎ도전!>
한밤에 운동하다가 아이폰 4S로 최종심사 탈락 소식을 확인하고 눈물을 삼킨 기억이 또렷하네요.
최종심사작 8작품 안에서 2작품을 뽑는데 아쉽게 제 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는 역시 안 되는구나 싶어서 글쟁이의 꿈을 접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봇치는 계속 들이박더군요. 밴드를 하고 싶다는 꿈에.
'말을 걸어줘....!!!'
아마 감독의 의도는 개그씬이었겠지만 제겐 그리 비치지 않았습니다.
어린 나이라서? 아니요. 코인이 없는 건 저랑 비슷했습니다. 빨리 중퇴하고 싶다는 대사도 그렇고, 암만 봐도 학업에 열중인 친구는 아니었거든요.
스스로를 벼랑 끝에 내몬 채로 무모한 도전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
그리고 공연에 위기가 찾아오자 이를 악물고 자기 잠재력을 폭발시켜 무사히 끝마치게 일조한 그 기지까지.
창작물이라 가능한 서사라 치부하기엔 제법 현실적이었고 따라하고픈 마음마저 들었습니다.
'나도 무대만 마련되면 봇치처럼 개화할 능력이 있지 않을까?'
곧이어 이런 망상에 가까운 생각이 피어났고, 그 결과.....
저는 첫 유료작을 연재 중인 웹소설 작가가 됐고,
스스로 생활비와 월세를 모두 충당하고도 돈이 남아 저축하고 있으며,
이번 설날에 20만원, 비록 간소하지만 처음으로 부모님께 용돈이란 걸 드려봤습니다.
저는 아직도 작년 11월의 그날을 잊지 못합니다.
"어머니, 이번 달은 생활비 안 주셔도 돼요."
못난 아들이 이 말을 하기까지 무려 35년이 걸렸습니다.
어머니께선 오열하셨습니다. 우리 아들이 드디어 자리를 잡았구나 하고.
솔직히 불안정한 자리입니다. 공기업 공무직이라도 하라고 등을 떠미셨는데, 그 공무직보다 훨씬 위태한 자리입니다.
감이 떨어지면, 혹은 차기작이 망하면 도로 위기에 봉착할 테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도록 열심히 인기작들을 인풋하면서 스스로 실력을 갈고 닦고 있습니다.
최대한 오래 글쟁이로 남고 싶습니다.
봇치 더 락!이라는 애니메이션이 선물해준 제2의, 아니 첫 번째 삶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