봇치 더 락 마이너 갤러리

[🍿후기]

30대 아저씨가 올리는 2.15 라이브뷰잉 용산CGV 후기

수퍼소닉
2025-02-20 01:22:41
조회 51
추천 10



"짜잔, 이거 봐라!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주셨어"


"와! 실버리온이다!"



산타클로스라는 존재를 언제까지 믿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이날까지는 확실히 믿고 있었다.


착한 일하고 부모님 말 잘 듣는 아이한테는 빨간 옷을 입은 배불뚝이 서양인 할아버지가 순록을 타고 와서 선물을 나눠준다고.


그래서 나는 11월부터 약 한 달 간 엄마 말을 잘 듣는 아이가 되기로 했고,


동생이 다니던 유치원에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나타나 로봇 장난감 선물을 전달해줬다는 말을 듣고 팔짝팔짝 뛰었다.







이때 칭찬을 받기란 매우 쉬웠다.


음식을 맨손으로 집어먹지 않기, 식사 전에 기도하기, 부모님이 TV를 볼 때는 얌전히 앉아있기.


정말 별 거 없는 약속만 지켜도 무수한 선물이 쏟아졌고, 덕분에 행복했다.


애당초 어린이들은 그러면서 크는 거니까.


난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얼마나 큰 특혜인지 전혀 몰랐다.







시간이 흘러 난 수험생이 됐다.


부모님의 미소가 줄고, 혼나는 시간이 늘었고, 칭찬과 선물을 받기 위한 노력 또한 훨씬 많이 요구됐다.


그러자 난 유치원생, 초등학교 시절이 그리워졌다.


엄숙한 자리에서 침묵을 지키기만 해도, 밥을 흘리지 않고 먹기만 해도 선물로 초콜릿과 사탕을 받던 시절.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그랬는데, 지금은 열심히 공부를 해야만 보상이 돌아오다니 너무 불행해.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이 철없는 생각이 지워지는데는 불과 10년조차 걸리지 않았다.







나이를 더 먹고 어른이 됐다.


이젠 무언가를 통해 칭찬을 받고 선물을 얻는다는 그 원초적인 루트가 아예 삶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새로운 자극이 줄어들면 뇌가 시간의 흐름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10대 시절은 1년 2년이 오랜 세월 같지만, 20대, 30대... 나이를 먹어갈수록 그게 체감이 안 된다는 것.


파티피플 공명의 오프닝에 맞춰 반반무치킨을 흥얼거릴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게 무려 3년 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경악했다.


'무언가를 위해 노력하고 - 이것을 통해 보상 받는다.'


이 패턴이 뚝 끊기고 그저 '죽지 못해 살아간다' 하나만 남으니 인생이 무료하고, 재미없고,


'내가 이만큼 오래 기다렸으니, 이만큼 잘했으니 그만큼 선물도 크겠지?' 이런 생각에 눈이 반짝이던 시절은 아예 다른 사람의 인생처럼 느껴졌다.







물론 그렇다고 기쁜 이벤트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다.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승리한다던지, 메이저리그에서 한국인 선수가 활약한다던지 등등...


하지만 이건 전국민이 함께 누리는 일시적 기쁨이지, '나에게' 특별한 이벤트라는 생각은 딱히 들지 않았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겠고, 뭘 기대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그렇게 점점 그레이톤으로 채색되던 인생에 오래간만에 색이 들기 시작했다.







CGV에서 알게 된 애니메이션.


총집편 극장판으로 입문해서 한 외톨이 소녀의 용기에서 비롯된 아싸탈출기를 보고


나 역시 감명과 자극을 받아 겨우 웹소설 작가로 독립하는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오래간만에 '보상'이란 개념을 느꼈다.


내가 열심히 쓴 원고를 사람들이 재밌다고 읽어주고, 선작을 박고, 댓글을 남기고, 유료화를 해도 100원을 결제하며 읽어줬으니까.


하지만 이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하늘은 내게 연달아 선물을 내려주셨다.


We Will B 라이브 뷰잉.






처음엔 안 가려고 했다. 난 이명 초기 증상을 앓고 있기 때문에.(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울려서 차폐음악을 틀고 있다)


그러나 이런 기회가 또 오진 않을 것 같아서, 한 번 글쟁이로 자리잡으니 다시 찾아온 배부른 권태감에 질려서 나는 약국에 들렀다.


뒤이어 일회용 귀마개를 사서 꽂고 입관했다.


일본어를 전혀 할 줄 모르고, 성우 방한 행사 당시엔 이 작품 자체를 몰랐기에


성우들이 나와 열창해도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니지카 성우는 음색이 독특해서 바로 알아챘다)


하지만 스포티파이를 통해 질리도록 들은 음악을 라이브 콘서트로 즐기고 있자니 흥이 돋아서 응원봉을 열심히 휘둘렀다.


그런데...



https://youtu.be/8NonXeQ5NcE



 



용산 7관에서 이 순간 나는 느꼈다.


엄마 말을 잘 들으며 기다리다가 실버리온 장난감을 받은 그때 기분을 무려 25년만에.


수능 공부처럼 의무감에 떠밀려서 한 일도 아니고, 스포츠 응원처럼 전국민의 분위기에 휩쓸린 것도 아니었다.


정말 순수하게 내가 원해서 기다렸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결과 내 품에 안긴 선물이니까.









어릴 적의 순수함과 기대감, 열정을 새까맣게 잊고


어느덧 세간의 때에 찌들어 염세적으로 변해가던 아저씨에게


'혹시 올해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왔을까?'하며 발을 동동 구르던 꼬꼬마 시절을 떠올리게 해줘서,


다시 한 번 그때와 같은 기쁨을 선물로 준 애니메이션


<봇치 더 락!>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사랑해 봇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