봇치 더 락 마이너 갤러리
[일반]
아는애가 티켓팅 두장 구해줬음 ㅋㅋㅋㅋ
아강
2025-07-25 19:14:25
조회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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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URL https://gall.dcinside.com/m/bocchi_the_rock/1746739
"……할 거야? 그 애랑, 데이트"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저녁의 귀갓길.
오후의 티타임을 마치고 애니플러스 카페를 뒤로 하는 내 소매를, 누군가의 작은 손이 붙잡았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받았잖아, 데이트 신청…… 아까 그 귀여운 애한테"
"귀여운? ……아아. 조금 전의 그 친절한 점원 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고개를 돌린 내 눈높이에서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낯익은 흑갈색의 바보털.
거기서 조금 시선을 내리자, 두 개의 커다란 루비색 눈동자가 불만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솔직히 조금 놀랐다. 라노벨을 제외한 세상 대부분의 일에 무관심한 이 소녀가, 여기까지 대놓고 감정을 드러내는 일은 흔치 않으니까.
"그 건에 대해서라면, 방금 쓰신 데이트라는 표현에는 조금 어폐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흐응"
변명 정도는 들어주겠다는듯, 반쯤 뜬 눈으로 내 말을 기다리는 소녀. 그 한 손에는 애매하게 먹다 남은 컵 아이스크림이 들려있었다.
정황 상 근처 자리에서 독서를 하던 중 우연히 나와 여성의 대화를 엿듣고, 카페를 나서는 내 뒷모습을 급히 쫓아 나온 거겠지.
크랜베리 샤베트인가. 어른스러움과 아이스러움이 공존하는 그녀다운 취향이라고, 조금 생각했다.
"그 여성 분과는 사적으로 간단한 거래를 했을 뿐입니다. 공교롭게도 이번 주말에 열릴 결속밴드의 내한공연 티켓을 2장 가지고 계시다고 해서요"
"……'공교롭게도', 말이지"
"네. 그래서 그 중 1장을 무료로 양도받는 대신, 하루동안 함께 안내 역을 해드리기로 했죠"
뭐. 쉽게 말해 일일 큐레이터다.
기본적으로는 내 플랜대로 마음껏 행사를 즐기되, 의뢰인을 곁에 데리고 다니며 중간중간 모르는 내용의 해설이나 행사 안내, 혹은 잡담의 상대를 해달라는 내용이다.
참가자들 중에서도 한 손에 꼽힐 상덕인 내게 있어서는 어려울 것 없는 의뢰라고 할 수 있겠지.
"……응. 내 자리에서도 들렸어. 설마 그런 사심이 빤히 보이는 권유를 우리 리더가 덥썩 승낙할 줄은 몰랐지만"
"사심……? 말씀하시는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대화 내용을 들으셨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요."
이런 부류의 이벤트를 한 번이라도 참가해본 적 있는 사람에게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겠지.
서코나 일페와는 다르게 기업 행사의 입장권은 그리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세한 사정은 듣지 못했지만, 아마 그 점원의 경우 가족의 누군가가 관련 기업의 관계자일 것이다.
기껏 굴러들어온 행운을 걷어차는 것도 비합리적인 행동일 터──그런 당연한 주장을 하는 나를, 소녀는 묘하게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경위가 어찌되었든" 하고, 드디어 본론을 꺼내는 소녀.
"남녀가 휴일에 약속 잡고 같이 놀러 나가는 행위를, 세간에서는 데이트라고 불러"
"그런 겁니까"
"그런 거라구. 적어도 상대는 백억만 퍼센트 '그런' 의도로 접근했을걸. 당신, 그런 성격인 주제에 얼굴만은 쓸데없이 괜찮으니까. ……응. 다시 떠올려봐도 확실해. 그건 분명 발정난 암컷의 눈. 봇붕 군 같은 연애 경험 제로의 순진한 오타쿠는 모르겠지만"
"……"
당신도 어엿한 오타쿠 결사의 일원 아닙니까, 라던가. 오늘따라 답지 않게 말이 많으시군요, 라는 감상은 조용히 삼켰다.
뭐, 눈앞의 소녀가 멋대로 단정지은 것과 달리, 나라고 해서 딱히 자신을 향한 그녀의 호의를 눈치 채지 못한 것은 아니다. 철 지난 둔감계 주인공도 아니고.
……그저 단순히, 신경을 쓸 이유가 없었을 뿐이다.
그녀가 내심 어떤 보상이나 관계를 바라며 내게 접근했던 간에, 나로서는 표면상의 의뢰를 수행하고 지정된 보수를 받을 수만 있다면 다른 건 어찌되든 상관 없는 일이니까.
타인의 감정에 일일히 진지하게 마주할 필요따윈 어디에도 없다. 마음대로 사랑에 빠지고 마음대로 실연하게 두면 된다. 물론, 그 소꿉놀이에 어울려주는 댓가로 티켓은 받아가겠지만.
"……만에 하나, 도 없을 가능성이라고는 생각하지만 말야"
하지만 나의 이런 드라이한 심중을, 루비색 눈동자는 꿰뚫어보지 못한 걸까.
"──절대, 진심이 되면 안 되니까. 그 내숭녀가 갑자기 발정해서 억지로 호텔에 끌고 가거나 해도, 기껏해야 하룻밤의 불장난 정도로 끝내 둬"
"호오. 육체 관계까지는 세이프인 겁니까. 생각보다 기준이 관대하시군요"
"응, 뭐…… 네, 봇붕 군도 일단 남자니까. 남자들은 전부 성욕의 노예라는 것 정도는 책에서 봐서 알고 있고…… 저렇게 '겉모습만은' 예쁜 여자가 진심으로 들이대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손가락 하나 대지 말라는 것도 조금 너무하지 않나 싶어서"
"……그렇습니까"
대체 어떤 상황을 상상하고 있는 건지, 묘하게 빨개진 얼굴로 빠르게 말을 잇는 소녀. 내 소매를 잡은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과연. 그런 이야기인가.
그녀 딴에는 '남심을 이해해주는 어른스러운 여자' 무브를 하고 싶었는지 뭔지 모르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다소 자존심을 건드리는 발언이다.
설마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무수한 에로게를 클리어하며 천을 넘는 수의 히로인들을 공략해온 이 내가──그런 범용(凡傭)한 현실 여성의 유혹에 넘어갈거란 걱정을 받게 될 줄은.
비유하자면 세계 정상급의 미식가더러 길가의 불량식품을 마음대로 주워 먹지 말라고 경고하는 꼴이다. 불쾌함을 넘어 조금 황당한 기분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겠지.
"뭐, 뭐…… 이제와서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만 말야. 응. 봇갤 정모에서도 그 여자 이상으로 귀여운 애들은 잔뜩 있고, 그런데도 봇붕 군은 언제나 사이코패스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철벽이고"
"……아뇨. 어쩌면──그 걱정은 틀리지 않은 걸지도 모릅니다. 여자의 감이라는 건 대단하네요"
"에"
본인이 의도한 바는 아니라고 해도, 은근한 모욕을 당한 탓일까.
조금, 이 소녀를 곤란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전까지 저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만…… 아무래도 저는 그 여성 분께, 어떤 종류의 끌림을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끄, 끌림이라니"
"정모의 분들에게는 없고 그 분에게는 있는 매력…… 굳이 표현하자면 '포용력'일까요. 아시다시피 봇갤 분들은 전원 상덕인만큼,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자기만의 확고부동한 취향과 신념을 가지고 계시지요. 덕분에 수준 높은 의견 교환이나 논쟁은 가능해도, 자신의 취미를 일방적으로 피로하거나 밀어붙히는 식의 커뮤니케이션은 불가능합니다"
"그건,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런 의미에서, 그 여성 분은 마치 순백의 도화지와 같은 정신세계를 가지고 계시더군요. 남자라면 무릇 자기 여자는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고 싶어하는 법. 시대를 불문하고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여성, 취미에 개방적인 여성이 매력적으로 여겨지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어쩌면 저 또한 예외가 아니었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물론 거짓말이다.
지금 말한 것은 어디까지나 대다수의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평균적인 연애관. 이레귤러인 내게는 해당되지 않는 무의미한 일반론에 불과하다.
남자와 여자 이전에 한 명의 인간으로서, 명확한 주관도 미학도 없이 타인의 말과 감정에 휘둘리며 살아갈 뿐인 존재를, 나는 혐오하기 때문이다.
오늘 처음 만나 조금 이야기를 나눠봤을 뿐인 여성이 거기에 해당한다고 단정지을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호감을 품을만한 요소는 아직 찾을 수 없을까.
"……봇붕 군은, 현실의 여자아이에게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는 거 아니었어?"
자기가 먼저 의심하는듯한 말을 해놓고, 마치 배신이라도 당한 듯 슬픈 눈을 하는 소녀. 여자 특유의 비겁함이다.
"……그건 과거의 사건들에 기반한 경험적 가설일 뿐, 미래영겁 불변할 절대법칙 같은 게 아닙니다. 흑조 이론(Black Swan Theory)──지금까지 없었던 일이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죠"
"그렇, 구나"
비겁한 질문에 비겁한 답을 돌려주는 나.
확언을 피해 상대의 불안감을 부추길 뿐인, 아무 의미도 없는 궤변이다.
"뭐, 일단은 돌아갈까요. 덕분에 행사를 기대할 이유가 한 가지 늘었군요. ……과연 그 여성 분이, 제 인생의 흑조가 될 수 있을지 어떨지"
"……"
말 없이 내 소매에서 손을 놓는 소녀.
그녀가 내 이성관계에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는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간다.
내가 현실의 인간과 사랑에 빠진 가짜 오타쿠로 전락해, 그 결과 정신적 지주를 잃은 결사가 붕괴해버리는 상황이 두려운 거겠지.
평생을 활자의 환상 속에서 살아온 그녀에게 있어 나는 처음으로 생긴 현실의 보금자리이자, 친구들과의 유일한 연결점이니까.
그걸 알면서 이런 짓궂은 장난을 치는 내 인성도 좀 어떨까 싶지만…… 뭐, 내일이라도 가볍게 사과해둘까. 아마 몇 대 맞을 것 같지만.
"……기다려, 봇붕 군"
집에 가서 볼 애니를 생각하며 뒤돌아 걷기 시작한 순간, 떨리는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 미리, 제대로 확인해두는 편이 좋겠다 싶어서"
"호오. 확인입니까. 대체 어떤 방법으로──"
──어느 틈에 접근한 것인가.
소녀의 흥미로운 제안에 나도 모르게 슬쩍 고개를 돌리자, 발돋움 한 소녀의 루비색 눈동자가 어느새 눈앞에 있었다.
그 다음 순간.
"……츄"
초겨울의 한기로 조금 차가워진 입술에, 부드러운 온기가 접했다.
크랜베리 샤베트의 맛.
머리카락에서 나는, 이름 모를 허브의 향기.
모든 전제를 뒤집어 엎는 상황변화를 사고가 채 따라잡기도 전에, 소녀의 양팔이 내 목 감싸 안아 도망칠 길을 봉한다.
"……츗…… 읍, 츄…… 파하…… 응, 츕……"
마치, 먹이를 쪼아먹는 참새와 같은 입맞춤이었다.
혀를 섞고 타액을 주고받는 어른의 키스는 아니지만, 서투른 움직임으로 필사적으로 접촉을 갈구하는 그 앳된 움직임에는, 남성의 지배욕을 미치게 하는 순진무구한 마성이 깃들어 있었다.
"…………프하"
마무리는 따스한 열기가 깃든 한숨.
끝나버린 순간의 여운을 음미하듯, 소녀는 입술에 손가락을 댄 채 수줍게 시선을 내린다.
──이윽고 무언가에 두려워하듯. 혹은 기대하듯, 천천히 이쪽을 올려다보는 그녀.
그 시선이 나와 맞은 순간.
"…………아……"
루비와 같은 두 눈동자가, 깊고 어두운 색으로 물들었다.
과연. 안도와 슬픔이라는 모순적인 두 감정이 섞일 때, 여자는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인가.
"…………응. 그거야, 봇붕 군. ……응. 그 눈"
사람은 자기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다.
따라서. 지금의 내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따위, 알 수 있을 리도 없지만.
"있는 힘껏 용기를 내서, 좋아하는 사람에게 한 발자국 내딛었는데…… 그런 시선이 돌아오면"
적어도.
정모에서도 세 손가락에 드는 미소녀에게 애정어린 입맞춤을 받은 지금의 내 감정을, 다른 무언가에 비유하자면──그래.
"그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여자아이 따위…… 있을 리 없는걸"
──콘크리트 벽에 입을 맞춘 것과, 완전히 동일한 기분이었다.
있는 것은 95퍼센트의 무감정, 그리고 위생 면에서의 불안에 기인한 약간의 불쾌감 뿐.
그 감상을 대놓고 드러낼 생각은 물론 없었지만, 그렇다고 필사적으로 숨길 생각 또한 없었다. 어느쪽도 불성실한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아, 그런가. 아무래도 나는 상당한 착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야 봇붕 군이지. 조금 전에 한 말도 역시 농담이었구나. ……응, 안심했어"
"……들고 계신 아이스크림이 녹고 있습니다. 입술이 할 일은 따로 있지 않을지"
"응? 아, 앗차차"
반쯤 액체가 된 샤베트를 본 소녀는, 조금 과장된 동작으로 꽂혀있던 스푼을 놀리기 시작했다. ……어째서인지 내 쪽에 등을 돌린 채.
그리고 십수 초 뒤──다시 이쪽을 향했을 때, 그녀의 표정은 평소와 같은 무심한 미소로 돌아와 있었다.
……그 이후는 평소대로.
최근 방영 중인 애니나 새로 나온 라노벨에 관한 잡담을 하며, 우리는 귀갓길을 걸었다.
한 가지 평소와 달랐던 것이라면──교차로에서 헤어지기 직전, 그녀가 중얼거린 한 마디 뿐.
"……그건 그렇고, 내 첫 키스는 콜라 맛이었네"
"……"
카페 점원으로부터 받은 의뢰는 취소했다.
이유는 특별히 없다.